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(문단 편집) === 전반기(1897~1945) === [[1897년]] [[2월 4일]] [[바이에른 왕국]]의 영토인 퓌르트(Fürth)에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. 가업을 잇기 위해 아버지가 운영하는 포목점에서 견습생으로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지만, 전 세계를 휩쓴 [[제1차 세계 대전]]의 소용돌이가 그를 덮쳤고, 형제들과 함께 [[독일군]]에 징집되어 참전했다. 전쟁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1918년 이프르 전투에서 어깨에 폭탄 파편을 맞는 부상을 당했다. 어깨 절단까지도 고려가 될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지만 다행히도 절단은 피할 수 있었다. 이후 [[전간기]]에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아 운영하는 한편, 대학교에서 경제학으로 학위를 수여받았다. 2차 대전의 와중에 종전 이후 펼칠 경제정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지만, [[스탈린그라드 전투]]의 참패 이후 [[총력전]]을 선언하면서 모든 국력을 전쟁에 쏟아붓고 있던 [[나치]] 정권하에서 이런 연구는 공식적으로 발표될 수 없는 것이었다. 급기야 [[1944년]]에는 더 극단적인 논문을 작성했다. 그 논문은 '''0의 시간'''(Stunde Null),[* 독일 내부에서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배한 직후를 이렇게 부른다.] 즉 독일의 패전을 전제조건으로 삼고, 전후 독일이 어떤 경제정책을 펼쳐 나가야 할 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었다. 패배주의는 즉결처형감으로,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 이후 장군들조차 우습게 처형되던 시기에 이런 논문은 말 그대로 목이 당장 잘려나가도 할 말이 없는 그런 내용이었다. 그런데도 단순히 이런 논문을 작성한 것으로도 모자라서, 이 논문을 독일 곳곳에 들고 다니면서 주변의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보여주었다.[* 후일 이 논문을 받아 본 한 친구는, "에르하르트는 이 논문이 유포됐을 시 자기가 [[죽음|어떤 위험]]에 처할 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."라고 증언했다.'] 다행히도 그를 [[게슈타포]]에게 고발한 친구들은 없었고, 그 덕분에 무사히 살아서 종전을 맞이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